갈등과 투쟁 아닌 협력 통해 의미 있는 존재 돼야


내 곁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은 아직 차지만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하늘을 보며 과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사르트르의 존재론과 시선에 의한 자아와 타자의 관계성에 대해 잠시 논해보자면, 우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거기에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다.
이는 모든 존재가 갖는 무상성 또는 우연성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인데 결국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한다는 의미로 보이며 이에 그는 그를 대체할 ‘타자’를 넣게 되는데 이 ‘타자’를 ‘시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의식이 그것을 자신의 지향성을 채우는 무엇인가로 여기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을 주체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좋다고 보여 지나 모든 것을 우연이며 타자가 있는 이 세계에 나온 것 자체를 원리라고 보는 것은 ‘존재와 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주체성이 아닌 의미 없는 존재로의 타락을 불러온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사르트르는 ‘타자’에 대한 시선의 개념을 통해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라는 정의를 내리며 이와 같은 타자의 출현을 나의 세계 내에서 발생한 ‘하나의 작은 균열’로 규정하고 있고 이 균열을 통해 나의 세계에 속했던 모든 것들은 그 인간-객체 쪽으로 끊임없이 흘러나간다고 보고 있다.
즉 바라보는-존재와 바라보인-존재의 변화를 승격과 강등으로 규정하고 결국 나와 타자는 서로에게 ‘협력하기’를 거절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난 사르트르의 나와 타자와의 구체적인 관계들의 예로 든 것 중 ‘언어’를 제외하고(실패도 성공도 아니라고 함) ‘사랑’ ‘마조히즘’ ‘사디즘’ ‘증오’ ‘무관심’ 그리고 ‘성적욕망’에 대해서 모두 실패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는 사르트르의 타자론에 의해 타자에 대해 내가 갖는 이중의 상반된 존재론적 지위를 따라 그 타자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갈등과 투쟁의 순화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고 만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어울림’이 아닌 배척을 통해 자신을 지켜가고자 하는 입장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지며 나와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죄의식이 아닌 ‘어울림’과 ‘받아들임’의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사람다움'이라는 진한 향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인'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서로에게 기대어 쉴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하여 '개인'이라 불리며 자신도 모르게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어둠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의미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줘야 할 것이다.
'청년'이란 아름다운 열정을 가진, 그 누구보다 가슴이 요동치는 우리들은 갈등과 투쟁이 아닌 진정성 있는 협력을 통해 '이 곳'을 바꿔나감으로써 후세에게 좀더 멋진 '그 곳'을 만들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을 '작은 균열'이 아닌 부족함을 채워주는 '작은 보살핌'으로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젠 '누군가'가가 아닌 '그 사람'으로 인해 가슴 뭉클한 하루를 보내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꿈꾸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